"> ', description: '나의 영웅 독립운동가를 찾아서(안중근의사기념관, 윤동주문학관, 우당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최근 어벤져스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힘이 쎈 사람도 있고 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도 있고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고 돈이 많은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지구를 지키는 내용이다.   마침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어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한 사람을 찾아 서울 여러 곳의 기념관에 갔다.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독립운동한 사람들 중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있고, 무기를 잘 쓰는 사람도 있고, 돈이 많은 사람도 있고, 머리를 잘 쓰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이 힘을 합치니 독립운동의 어벤져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만나 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글로 쓰면서 다시 기억하려고 한다.윤동주 문학관에 들어가기 전에 문학관 왼쪽 위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시인의 언덕이 나타난다.   시인의 언덕으로 올라가 보면 비석 같은 바위가 있는데 앞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고 바위 뒤에는 "슬픈 족속"이라는 시가 있다.   언덕이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 밑으로 많은 빨간지붕의 집들이 보이고, 언덕 위쪽으로 한양성곽의 일부가 보였다.   윤동주 문학관은 예전에 수도가압장과 물탱크가 있던 곳을 개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기념관들과는 다르게 생겨 보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영화를 본 3전시실이 물탱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전시실은 윤동주 시인의 일생이 나온 사진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과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의 많은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전시실에서는 10분정도 영상을 보았는데 윤동주 시인의 일생과 시에 대해서 나왔다.   극장이 아닌데도 소리가 울려서 느낌이 색달랐다. 물탱크의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소리인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에서 다른 한국 학생들과 밤새 한국인의 정신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끌려 갔다.   윤동주 시인은 총이나 폭탄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닌 문학과 시로 일본에 맞서 한국인의 정신을 잃지 않고 독립의 희망을 글로서 노래했다.   우리나라가 독립된 때가 1945년 8월 15일인데, 1945년 2월 일본 감옥에서 생체 실험으로 죽었다고 한다.   '내가 일제시대에 살았으면 어떻했을까?' 생각해도 무섭다.   하지만, 윤동주 문학관을 보고 난 뒤에 깨달은 점은 글로도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처럼 문학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야겠다.      개선할 점 :    주차 공간이 따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차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어디다 차를 주차해야 할지 곤란해 할 것 같다.   3전시실은 겨울에는 난방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어떻데 난방을 할지 모르겠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들어가기 전 바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유언이 써져 있었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유언이 너무 멋지면서도 이상하게 슬퍼보인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독립운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 기념관을 들어가면 바로 안중근 의사 석상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대한독립이라는 글이 거대한 태극기에 쓰여 있다.   그리고 기념관은 층별로 전시실이 나뉘어져 있다. 지하1층에는 대한독립과 안중근 의사 석상이 있고,1층에는 안중근의사의 활동도가 있다.   2층에는 하얼빈의거 모습이 있으며, 추모실도 있다.      안중근은 의사로 불린다. 일본인에게 목숨을 걸고 무기를 들고 싸우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계획을 했다. 중국 하얼빈으로 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자    권총을 사용해 그를 쏴 죽였다.    같이 계획을 짠 다른 사람들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으나, 안중근은 사람들 사이로 숨어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쏜 후 도망가지 않고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중국 뤼순에 있는 감옥에 있다가 재판서에 가서 재판장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왕을 몰아내고,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죄가 있다고 말을 했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사랑에 대한 정말 대단한 의지력을 가졌다. 그렇게 대단한 의지력은 누구도 넘을 수 없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중 하나는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을 죽을 때까지 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잘라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글씨를 썼다.   손가락이 잘린 걸 보면 무섭기도 하고, 대한독립의 의지가 대단하다는 걸 느꼇다.    나 같으면 나라를 사랑하더라도 손가락이나 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상상만 해도 너무 아프고 힘들 것 같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러 온 길에 들린 우당 기념관. 이회영 선생님 이름은 처음 듣게 된다.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같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모르고 있었는데처음 알게 되는 이회영 선생님의 활동을 듣고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기념관 입구에는 있는 작은 책자에는 "노블레스오블리주의 살아있는 역사의 주역 이회영"이라는 처음 듣는 나에게는 아주 어려운 말이 써 있었다.   그래서 들은 설명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명예(노블리스)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회영 선생님은 알아주는 양반집이자 부자집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으신 분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의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신의 재산과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에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회영 선생님과 그 가족들은 양반신분도 버리고,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고 중국 만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으로 가기 전에 노비문서를 태워 노비를 모두 풀어주었다.      이회영 선생님의 대표적인 업적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을사늑약 무효화 투쟁을 하였다.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하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였다.   1910년 전가족이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청산리 전투를 참가하는 군인을 키웠다.   10년 동안 3,500여명 독립군 간부 양성하였다.   1919년 상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의정원 참여하였다.   1919년 북경으로 이동하여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하였다.      이회영 선생님은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때, 모든 재산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는 지도자의 길을 실천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선생님의 큰 뜻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구 선생님은 굉장히 많은 활동들을 하시고 업적도 많으시다. 기념관 내에 곳곳에 적혀 있는 업적 중 대표적인 것만 뽑아서 정리하였다.    김구 선생님은 1876부터 1949년까지 살았다.   18세에 동학운동에 참가를 했다.   21세에 일본인 육군 중위 스치다를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처단을 하였다.   영화 김창수에서 김구 선생님은 붙잡혀 인천 감옥에 갇혀서 감옥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너무 대단한 사람라고 생각했다.    23세까지 2년동안 감혹생활을 하다 탈옥을 하였다.   1905년(30세)에 을사조약 무효운동을 하였다.   1907년(32세)에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을 하였다.   1911년(36세)에 서대문 감옥에 수감 되었다.   1915년(40세)에 가석방하였다.   1919년(44세)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하였다.   1922년(47세)에 한국 노병회 조직하여 독립금 자금 확보하였다.   1931년(56세)에 한인 애국단 참단이라는 비밀 공격 조직을 만들어 윤봉길,이봉창 등을 키우고 지원했다.   1932년(57세)에 윤봉길 의사가 상해 공원의거로 일왕 히로히토 수류탄을 던지도록 지시했다.   1934년(59세)에 특무대 독립군 조직하였다.   1937년(62세)에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만들었다.   1940년(65세)에 한국 광복군 창설 임시정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66세)에 일본에 전쟁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3년(68세)에 장제스와 만나고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독립지원 요청하였다.   1945년(70세) 8월 독립운동 2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8년(73세)에 남북 협상에 참가하여 통일 정부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정부수립이 되었다.   1949년(74세)에 친일파 총맞고 사망하였다.      <나의소원>중 잘 요약되어서 가슴에 와 닫는 말이 있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돈이 힘이고, 군사력이 있어야 하고, 문화와 지식을 가져야 한다."   김구 선생님은 무엇이 문제인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너무나 훌륭하고 많은 일들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선점 :    1)백범김구기념관은 교육을 받는 어린 학생들 입장에서는 너무 복잡하고 관련된 사람들과 내용도 많다.   그래서 내생각은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얼굴 또는 중요 사건들을 퍼즐로 만들어 놓으면 좋겠다.   2)김구 선생님 업적이 많기는 하지만 너무 역사적인 활동을 설명 위주로 전시가 되어 있어서 나 뿐 아니라 또래 다른 친구도 쉽게    지쳐보인다. 초등학생의 흥미유도를 위해 만화같은 삽화도 군데군데 넣고 중요한 업적을 모아서 영상으로 편집해서 만들면,   친구들이 관심있는 활동을 영상을 통해서 더 흥미있게 보면서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3)그리고 영상실에는 영상을 관람 온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10대용, 20대용, 어른용 이런식으로 연령별로 구별해서 방을 만들어 틀어놓으면 좋을것 같다.   4)설명 차트에는 버튼을 누르면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게 있으면 좋겠다.   5)여러 곳에 헤드폰 표시가 있는데 실제로 헤드폰이 걸려있지는 않았다.    알아보니 사전예약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념관 도착하고 30분 후 예약 이런 식으로 바꾸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체시설평가   방문한 대부분의 시설의 설명이 한글과 영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인, 일본인들도 방문하던데 외국인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선택을 하여 음성 설명들을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글을 마치며 일제식민 시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발자취를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국문화를 지키기 위해, 그분들은 목숨 걸고 활동했기 때문에 지금은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현재 학생인 내가 할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우리말 한글과 문화와 문화재를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해야겠다.과거의 역사를 바르게 알고 내가 아는 것을 내동생이나 친구에게 알려줘야 겠다.이것이 바로 나라사랑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더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여러 곳의 기념관을 돌아다니며서 힘들었지만 나라사랑을 위해 많은것을 가슴깊이 깨닫게 되었다.', imageWidth: 751, imageHeight: 441, imageUrl: 'http://thecontest.co.kr/common/download.php?ftype=content&fid=823353', link: { mobileWebUrl: 'http://m.thecontest.co.kr/contest/contest_board_view.php?ccont_id=823353&cnst_id=4969', webUrl: 'http://thecontest.co.kr/contest/contest_board_view.php?ccont_id=823353&cnst_id=4969' }, }, social: { viewCount: 362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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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등대사랑   |   조회  3,629    |   투표  10
1.jpg
나의 영웅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안중근의사기념관, 윤동주문학관, 우당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최근 어벤져스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힘이 쎈 사람도 있고 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고 돈이 많은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지구를 지키는 내용이다.  
마침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어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한 사람을 찾아 서울 여러 곳의 기념관에 갔다.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독립운동한 사람들 중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있고, 무기를 잘 쓰는 사람도 있고,
돈이 많은 사람도 있고, 머리를 잘 쓰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이 힘을 합치니 독립운동의 어벤져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만나 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글로 쓰면서 다시 기억하려고 한다.

윤동주1.jpg
윤동주 문학관에 들어가기 전에 문학관 왼쪽 위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시인의 언덕이 나타난다.  
시인의 언덕으로 올라가 보면 비석 같은 바위가 있는데 앞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고 바위 뒤에는
 "슬픈 족속"이라는 시가 있다.  
언덕이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 밑으로 많은 빨간지붕의 집들이 보이고, 언덕 위쪽으로 한양성곽의 일부가 보였다.  
윤동주 문학관은 예전에 수도가압장과 물탱크가 있던 곳을 개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기념관들과는
다르게 생겨 보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영화를 본 3전시실이 물탱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전시실은 윤동주 시인의 일생이 나온 사진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과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의 많은
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전시실에서는 10분정도 영상을 보았는데 윤동주 시인의 일생과 시에 대해서 나왔다.  
극장이 아닌데도 소리가 울려서 느낌이 색달랐다. 물탱크의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소리인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에서 다른 한국 학생들과 밤새 한국인의 정신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끌려 갔다.  
윤동주 시인은 총이나 폭탄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닌 문학과 시로 일본에 맞서 한국인의 정신을 잃지 않고
독립의 희망을 글로서 노래했다.  
우리나라가 독립된 때가 1945년 8월 15일인데, 1945년 2월 일본 감옥에서 생체 실험으로 죽었다고 한다.  
'내가 일제시대에 살았으면 어떻했을까?' 생각해도 무섭다.  
하지만, 윤동주 문학관을 보고 난 뒤에 깨달은 점은 글로도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처럼 문학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야겠다.  
  
개선할 점 :   
주차 공간이 따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차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어디다 차를 주차해야 할지 곤란해 할 것 같다.  
3전시실은 겨울에는 난방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어떻데 난방을 할지 모르겠다.  


안중근.jpg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들어가기 전 바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유언이 써져 있었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유언이 너무 멋지면서도 이상하게 슬퍼보인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독립운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 기념관을 들어가면 바로 안중근 의사 석상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대한독립이라는 글이 거대한 태극기에
쓰여 있다.  
그리고 기념관은 층별로 전시실이 나뉘어져 있다. 지하1층에는 대한독립과 안중근 의사 석상이 있고,1층에는
안중근의사의 활동도가 있다.  
2층에는 하얼빈의거 모습이 있으며, 추모실도 있다.  
  
안중근은 의사로 불린다. 일본인에게 목숨을 걸고 무기를 들고 싸우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계획을 했다. 중국 하얼빈으로 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자   
권총을 사용해 그를 쏴 죽였다.   
같이 계획을 짠 다른 사람들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으나, 안중근은 사람들 사이로 숨어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쏜 후 도망가지 않고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중국 뤼순에 있는 감옥에 있다가 재판서에 가서 재판장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왕을 몰아내고,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죄가 있다고 말을 했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사랑에 대한 정말 대단한 의지력을 가졌다. 그렇게 대단한 의지력은 누구도 넘을 수 없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중 하나는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을 죽을 때까지 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잘라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글씨를 썼다.  
손가락이 잘린 걸 보면 무섭기도 하고, 대한독립의 의지가 대단하다는 걸 느꼇다.   
나 같으면 나라를 사랑하더라도 손가락이나 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상상만 해도 너무 아프고 힘들 것 같다.  

우당기념관이회영.jpg

윤동주 시인을 만나러 온 길에 들린 우당 기념관. 이회영 선생님 이름은 처음 듣게 된다.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같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모르고 있었는데
처음 알게 되는 이회영 선생님의 활동을 듣고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기념관 입구에는 있는 작은 책자에는 "노블레스오블리주의 살아있는 역사의 주역 이회영"이라는 처음 듣는
 나에게는 아주 어려운 말이 써 있었다.  
그래서 들은 설명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명예(노블리스)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회영 선생님은 알아주는 양반집이자 부자집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으신 분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의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신의 재산과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에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회영 선생님과 그 가족들은 양반신분도 버리고,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고 중국 만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으로 가기 전에 노비문서를 태워 노비를 모두 풀어주었다.  
  
이회영 선생님의 대표적인 업적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을사늑약 무효화 투쟁을 하였다.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하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였다.  
1910년 전가족이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청산리 전투를 참가하는 군인을 키웠다.  
10년 동안 3,500여명 독립군 간부 양성하였다.  
1919년 상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의정원 참여하였다.  
1919년 북경으로 이동하여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하였다.  
  
이회영 선생님은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때, 모든 재산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려는
지도자의 길을 실천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선생님의 큰 뜻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구1.jpg

김구 선생님은 굉장히 많은 활동들을 하시고 업적도 많으시다. 기념관 내에 곳곳에 적혀 있는 업적 중 대표적인 것만
 뽑아서 정리하였다.   
김구 선생님은 1876부터 1949년까지 살았다.  
18세에 동학운동에 참가를 했다.  
21세에 일본인 육군 중위 스치다를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처단을 하였다.  
영화 김창수에서 김구 선생님은 붙잡혀 인천 감옥에 갇혀서 감옥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너무 대단한 사람라고 생각했다.   
23세까지 2년동안 감혹생활을 하다 탈옥을 하였다.  
1905년(30세)에 을사조약 무효운동을 하였다.  
1907년(32세)에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을 하였다.  
1911년(36세)에 서대문 감옥에 수감 되었다.  
1915년(40세)에 가석방하였다.  
1919년(44세)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하였다.  
1922년(47세)에 한국 노병회 조직하여 독립금 자금 확보하였다.  
1931년(56세)에 한인 애국단 참단이라는 비밀 공격 조직을 만들어 윤봉길,이봉창 등을 키우고 지원했다.  
1932년(57세)에 윤봉길 의사가 상해 공원의거로 일왕 히로히토 수류탄을 던지도록 지시했다.  
1934년(59세)에 특무대 독립군 조직하였다.  
1937년(62세)에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만들었다.  
1940년(65세)에 한국 광복군 창설 임시정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66세)에 일본에 전쟁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3년(68세)에 장제스와 만나고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독립지원 요청하였다.  
1945년(70세) 8월 독립운동 2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8년(73세)에 남북 협상에 참가하여 통일 정부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정부수립이 되었다.  
1949년(74세)에 친일파 총맞고 사망하였다.  
  
<나의소원>중 잘 요약되어서 가슴에 와 닫는 말이 있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돈이 힘이고, 군사력이 있어야 하고, 문화와 지식을 가져야 한다."  
김구 선생님은 무엇이 문제인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너무나 훌륭하고 많은 일들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선점 :   
1)백범김구기념관은 교육을 받는 어린 학생들 입장에서는 너무 복잡하고 관련된 사람들과 내용도 많다.  
그래서 내생각은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얼굴 또는 중요 사건들을 퍼즐로 만들어 놓으면 좋겠다.  
2)김구 선생님 업적이 많기는 하지만 너무 역사적인 활동을 설명 위주로 전시가 되어 있어서 나 뿐 아니라
또래 다른 친구도 쉽게   
지쳐보인다. 초등학생의 흥미유도를 위해 만화같은 삽화도 군데군데 넣고 중요한 업적을 모아서 영상으로
편집해서 만들면,   친구들이 관심있는 활동을 영상을 통해서 더 흥미있게 보면서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3)그리고 영상실에는 영상을 관람 온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10대용, 20대용, 어른용 이런식으로 연령별로
구별해서 방을 만들어 틀어놓으면 좋을것 같다.  
4)설명 차트에는 버튼을 누르면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게 있으면 좋겠다.  
5)여러 곳에 헤드폰 표시가 있는데 실제로 헤드폰이 걸려있지는 않았다.   
알아보니 사전예약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념관 도착하고 30분 후 예약 이런 식으로 바
꾸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2.jpg
  
전체시설평가  
방문한 대부분의 시설의 설명이 한글과 영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인, 일본인들도 방문하던데
 외국인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선택을 하여 음성 설명들을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글을 마치며 
일제식민 시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발자취를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국문화를 지키기 위해, 그분들은 목숨 걸고 활동했기 때문에
지금은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현재 학생인 내가 할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
우리말 한글과 문화와 문화재를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해야겠다.
과거의 역사를 바르게 알고 내가 아는 것을 내동생이나 친구에게 알려줘야 겠다.
이것이 바로 나라사랑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더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여러 곳의 기념관을 돌아다니며서 힘들었지만
나라사랑을 위해 많은것을 가슴깊이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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