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description: '멈춰진 시간, 4. 15를 기억하다.- 제암리 박물관을 다녀와서 -#1. 제암리 박물관으로나는 3.1 운동 100주년 특별전이 열리는 ‘화성시 3.1운동 제암리 박물관’에 갔다.그곳은 100년 전 제암리 대학살이 일어났던 제암리 교회를 박물관으로 만든 조용한 시골 교회였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라는 박물관 앞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이곳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특별전에 대한 기대감과 빨리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2. 100년 전 외침 "대한독립 만세"제암리 교회와 연결된 박물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화성지역에서의 3.1운동 역사를 설명하는 복도가 나온다.화성지역의 3.1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거셌다.100년 전인 1919년 일본은 화성지역의 거센 3.1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전차단해야한다고 판단하여 특별검거반을 파견하였다. 특별검거반은 시위 지도자를 검거하기 위해 고문·살상·방화 등을 저질렀고 4.15일 제암리학살 사건을 일으켰다.복도를 지나면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곳에 발바닥 표시가 있었다.발자국 위에 서니 제암리 학살사건을 설명하는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다일본군은 지난번에 매질한 것을 사과하러 왔다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예배당으로 모이게 했다. 그러고 나서는 모든 출입구를 못 박고 안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였다.이어서 짚을 던지고 기름을 두른 후 예배당에 불을 지폈다.이를 안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이 총으로 사격을 하고 총칼로 찔러 죽였다.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군은 인근 고주리로 달려가 김흥렬씨와 일가족 6명을 만세주동자로 몰아 총살했다. 이러한 만행을 감추기 위해 시실들을 토막토막 내어 뒤엉키게 하고는 태워버렸다.다행히 이 광경을 목격한 할머니가 기억을 더듬어 당시 시체들이 매장된 장소를 발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복도에 걸린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대부분 복도에는 사진과 증언들이 액자로 걸려 있었는데 자료들을 잘 정리하여 터치하면 사진이나 관련된 영상들이 재생되는 방식으로 바뀐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제암리 박물관은 제암리 사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3.1운동 역사들도 설명하고 있었는데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서대문형무소의 1평짜리 감옥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검거되어 1평에 3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13명 이상을 수용하여독립운동가들은 앉을 수도 없는 좁은 자리에서 번갈아가며 2∼3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계단을 올라오면 관람이 끝난다.캐리커쳐가 독립운동가들의 특징을 정말 잘 살려서 귀엽고 실감나게 그려져 있었다.그런데 계단이 조금 좁아서 조심히 나가느라 엄마가 사진찍자고 멈춰섰을 때야 캐리커쳐를 발견했다. 밖으로 나오면 3.1운동 기념탑과 기념비로 올라가는 태극기 계단으로 연결된다.기념탑에 씌여진 시를 읽고, 계단에서 동생과 대한독립 만세도 외쳤다. #3. 우리의 친구 "스코필드"당시 조선에서 선교사로 있던 영국 태생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현장의 사진과 목격자의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내면서 이러한 참상은 전 세계로 밝혀졌다.스코필드는 ‘석호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3.1운동 민족대표 제34인’으로도 불린다.1969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그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한다.나는 이렇게 의로운 일을 한 스코필드에게 ‘퓰리처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퓰리처 상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었을 때 주는 언론계의 노벨상이다. 외국인들 마저도 목숨을 바쳐 도울 만큼 일본의 학살은 잔인했고, 우리의 독립은 절박했던 것이다.다만 스코필드 기념 동상이 잔디밭 위에 있어서 친구처럼 사진도 찍고 좋았지만비가 오면 맞으셔야 한다고 생각하니 우산을 옆에 놓아드리고 싶었다. #4. 나의 선택, 대한민국의 선택박물관에서 돌아오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렇게 고통스럽게 죽고도.. 시체가 훼손될 걸 알면서도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진정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곁에 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떠날 자신이 있을까?아니... 나는 하지 못했을 것 같다.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엄청난 수모와 모욕을 당하고, 폭행, 죽임을 당하면서 정말 그 순간순간 나라를 기억하며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대한독립을 외쳤다.그런데! 일본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한마디를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히틀러는 많은 유대인의 생명을 처참하게 짓밟았지만 진심으로 유대인에게 사과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뉘우쳤다. 그리고 용서받았다.일본도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한다. 그리고 그 실수를 뉘우치고 사죄하는 사람이야 말로 훌륭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사과해 오겠지...’하지만 이렇게 기다려왔던 우리는 다시 한번 뒤통수를 맞았다. 별것도 아닌 것들로 트집을 잡더니 대한민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고, 반도체를 만드는 주원료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단어가 떠올랐다. “뻔뻔함” 우리도 지금까지 참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한다.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 ‘미안합니다’ 이 한마디를 바라는 것이다.이제 당신의 선택이다.   ', imageWidth: 751, imageHeight: 441, imageUrl: 'http://thecontest.co.kr/common/download.php?ftype=content&fid=823459', link: { mobileWebUrl: 'http://m.thecontest.co.kr/contest/contest_board_view.php?ccont_id=823459&cnst_id=4969', webUrl: 'http://thecontest.co.kr/contest/contest_board_view.php?ccont_id=823459&cnst_id=4969' }, }, social: { viewCount: 196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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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진 시간, 4. 15를 기억하다.
- 제암리 박물관을 다녀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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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암리 박물관으로

나는 3.1 운동 100주년 특별전이 열리는 화성시 3.1운동 제암리 박물관에 갔다.

그곳은 100년 전 제암리 대학살이 일어났던 제암리 교회를 박물관으로 만든 조용한 시골 교회였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라는 박물관 앞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이곳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특별전에 대한 기대감과 빨리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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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0년 전 외침 "대한독립 만세"

제암리 교회와 연결된 박물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화성지역에서의 3.1운동 역사를 설명하는 복도가 나온다.

화성지역의 3.1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거셌다.

100년 전인 1919년 일본은 화성지역의 거센 3.1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전

차단해야한다고 판단하여 특별검거반을 파견하였다.

특별검거반은 시위 지도자를 검거하기 위해 고문·살상·방화 등을 저질렀고

4.15일 제암리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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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지나면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곳에 발바닥 표시가 있었다.

발자국 위에 서니 제암리 학살사건을 설명하는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다

일본군은 지난번에 매질한 것을 사과하러 왔다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예배당으로 모이게 했다.

그러고 나서는 모든 출입구를 못 박고 안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서 짚을 던지고 기름을 두른 후 예배당에 불을 지폈다.

이를 안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이 총으로 사격을 하고 총칼로 찔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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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군은 인근 고주리로 달려가 김흥렬씨와

일가족 6명을 만세주동자로 몰아 총살했다.

이러한 만행을 감추기 위해 시실들을 토막토막 내어 뒤엉키게 하고는 태워버렸다.

다행히 이 광경을 목격한 할머니가 기억을 더듬어

당시 시체들이 매장된 장소를 발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복도에 걸린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대부분 복도에는 사진과 증언들이 액자로 걸려 있었는데

자료들을 잘 정리하여 터치하면 사진이나 관련된 영상들이 재생되는 방식으로 바뀐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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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박물관은 제암리 사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3.1운동 역사들도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서대문형무소의 1평짜리 감옥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19193.1운동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검거되어 1평에 3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13명 이상을 수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앉을 수도 없는 좁은 자리에서 번갈아가며 23

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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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계단을 올라오면 관람이 끝난다.

캐리커쳐가 독립운동가들의 특징을 정말 잘 살려서 귀엽고 실감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계단이 조금 좁아서 조심히 나가느라 엄마가 사진찍자고 멈춰섰을 때야 캐리커쳐를 발견했다.

밖으로 나오면 3.1운동 기념탑과 기념비로 올라가는 태극기 계단으로 연결된다.

기념탑에 씌여진 시를 읽고, 계단에서 동생과 대한독립 만세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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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의 친구 "스코필드"

당시 조선에서 선교사로 있던 영국 태생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현장의 사진과 목격자의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내면서

이러한 참상은 전 세계로 밝혀졌다.

스코필드는 석호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3.1운동 민족대표 제34으로도 불린다.

1969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그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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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의로운 일을 한 스코필드에게 퓰리처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퓰리처 상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었을 때 주는 언론계의 노벨상이다.

외국인들 마저도 목숨을 바쳐 도울 만큼 일본의 학살은 잔인했고, 우리의 독립은 절박했던 것이다.

다만 스코필드 기념 동상이 잔디밭 위에 있어서 친구처럼 사진도 찍고 좋았지만

비가 오면 맞으셔야 한다고 생각하니 우산을 옆에 놓아드리고 싶었다.


 #4. 나의 선택, 대한민국의 선택

박물관에서 돌아오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고도.. 시체가 훼손될 걸 알면서도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진정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곁에 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떠날 자신이 있을까?

아니... 나는 하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엄청난 수모와 모욕을 당하고, 폭행, 죽임을 당하면서 정말 그 순간순간 나라를 기억하며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대한독립을 외쳤다.

그런데! 일본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이 한마디를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히틀러는 많은 유대인의 생명을 처참하게 짓밟았지만

 진심으로 유대인에게 사과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뉘우쳤다.

그리고 용서받았다.

일본도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한다. 그리고 그 실수를 뉘우치고 사죄하는 사람이야 말로 훌륭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사과해 오겠지...’

하지만 이렇게 기다려왔던 우리는 다시 한번 뒤통수를 맞았다.

별것도 아닌 것들로 트집을 잡더니 대한민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고,

반도체를 만드는 주원료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단어가 떠올랐다. 뻔뻔함

우리도 지금까지 참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 미안합니다이 한마디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당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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